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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작가의 말, 내용, 출판사 서평

by 져느니 2024. 5. 23.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작가의 말

“너는 왜 거기 있는가?”
사월의 꽃들이 묻습니다.
대답을 준비하는 동안 모여든 생각들이 꽃잎처럼 흩날리며 떨어져 쌓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에 와 있습니다.
정오는 밝고 환한 시간입니다. 생명을 가진 것들이 가장 왕성하게 살아 움직이는 시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사람과 자연이 푸르고 따뜻하게 공생하는 시간입니다. 알베르 까뮈는 정오를 균형 잡힌 시간이라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내면은 균형이 깨진 채 극단으로 가 있습니다. 세상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외화된 게 세상이라고 한다면 어둡고, 거칠고, 사나운 세상은 우리가 만든 것입니다. 성찰 없는 용기, 절제 없는 언어, 영혼 없는 정치는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가게 합니다.

“너는 왜 거기 있는가?”
오월의 나무들도 묻습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쌓인 고뇌의 흔적들을 우선 시로 먼저 내어놓습니다. 부족하고 부족한 데가 많은 저를 데리고 이 순간까지 함께 와주신 분, 여기까지 동행해주신 고마운 분들께 머리 숙여 깊이 절합니다. 고맙습니다.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내용

지금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사방이 바닷속 같은 어둠입니다
우리 안의 깊은 곳도
환한 시간이 불빛처럼 내려올 때 있고
해 뜨는 쪽과 멀어져 그늘질 때 있고
캄캄해져 사물을 분별하지 못할 때 있습니다
그 모두가 내 안의 늪으로 흘러와 고입니다
서로를 부족한 그대로 인정하게 하소서
타인이 지옥이지 않게 하소서
곳곳이 전쟁터이오니
당신 손으로 이 내전을 종식하여주소서
사람들이 고요한 밤의
깊은 흑요석 같은 시간을 만나게 하여주소서
내 안의 어두운 나를 차분히 응시하게 하여주소서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부분

 

지금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사방이 바닷속 같은 어둠입니다
우리 안의 깊은 곳도
환한 시간이 불빛처럼 내려올 때 있고
해 뜨는 쪽과 멀어져 그늘질 때 있고
캄캄해져 사물을 분별하지 못할 때 있습니다
그 모두가 내 안의 늪으로 흘러와 고입니다
서로를 부족한 그대로 인정하게 하소서
타인이 지옥이지 않게 하소서
곳곳이 전쟁터이오니
당신 손으로 이 내전을 종식하여주소서
사람들이 고요한 밤의
깊은 흑요석 같은 시간을 만나게 하여주소서
내 안의 어두운 나를 차분히 응시하게 하여주소서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부분

 

결실이라는 말을 나는 함부로 쓰지 않는다
충만이라는 말의 무게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빛깔과 향기에
감사해하지만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사람들은 내 몸의 터질 듯한 과육에 주목하지만
여기까지 함께 온 나뭇잎들을
나는 더 애틋하게 바라본다
내 몸 안쪽에도 내상의 흔적이 많지만
태풍에 찢긴 잎은 상처가 더 깊어졌고
나 대신 벌레에게 살을 내준 잎은
몸 한쪽이 허물어졌다
내게 물방울을 몰아주고 난 뒤 바싹 마른 잎과
깊은 멍이 든 잎 들이
여기까지 함께 왔다
그들 없이 나 혼자 왔다면
팔월의 칼끝 같은 시간을 넘지 못했으리라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내 몸을 붙잡아준
꼭지의 헌신이 없었다면
나는 노랗게 익어가는 시간까지 오지 못했으리라
이들과 함께 왔다
나는 나무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결실」 전문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출판사 서평

한국시단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으로서 올해 등단 40주년을 맞이한 도종환의 열두번째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이 창비시선 501번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보듬는 “격렬한 희망”(박성우, 추천사)의 시로 먹먹한 감동을 선사한 『사월 바다』(창비 2016)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뜻깊은 시집입니다. 시인은 3선 국회의원이자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 현실정치에 투신하는 동안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온 “고뇌의 흔적들”(시인의 말)을 진솔한 언어로 토로합니다. 동시에 자연을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순환하는 계절의 흐름에 실어 섬세하고 정갈한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오랜 시간 맑고 투명한 시심을 잃지 않은 시인의 견결한 마음이 뭉클하게 와닿습니다. 특히 연륜과 내공이 엿보이는 단형시의 아포리즘은 서정의 진수를 보여주는 한편 시집의 품격을 높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혐오하는 세태, 거친 분노의 언어가 들끓는 어둠의 시대 정중앙에서 시인은 알베르 까뮈가 말한 ‘정오의 사상’을 소환합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용을 추구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조화, 즉 정오에 다다르게 된다는 사상입니다. 정치와 시, 도시와 자연. 절대 맞닿지 않을 듯 보이는 양극에 동시에 발 디딘 채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치며 마음을 정순하게 가다듬어온 시인의 귀한 깨우침이 적확하고 미려한 시편들로 화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부조리한 세상을 꾸짖는 그의 노성이 장엄합니다. 자연 앞에서 자신을 겸허히 낮추며 깨우침을 희구하는 기도는 감미롭습니다. 정신적 내전 상태에 다다른 현대인에게 “순결한 정신주의자의 고뇌”로 읽힐 이 시집은 “마음의 쓴 약”과 “회초리”(안도현, 추천사)가 되어 잔잔하지만 묵직한 울림으로 가슴 깊이 퍼질 것입니다.